- [성경본문] 히브리서10:19-20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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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어떤 길로 가고 있습니까?(히브리서 10:19-20/2023.7.9.오전)
1.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선택한 길을 가는 데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길은 어떤 길이고, 가장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만물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 인생을 축복하시고, 우리 영혼을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시고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인생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복잡한 제사의 절차를 거쳐야 했는데, 그렇게 해도 아무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드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시고 피 흘려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죄와 허물을 직접 하나님께 아뢰고, 그분 앞에서 찬양과 감사로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마침내 두려움은 사라지고 의심 대신에 확신과 소망에 넘치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그것은 날 위해 살을 찢고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만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길입니다.
22절 하반절에,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바른 자세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여기서 참 마음이란 주님을 향한 충성된 마음이요, 온전한 믿음은 당시 신앙인들의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믿음을 견고히 지키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또한 19절에,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 다고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길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보면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되고, 행복할 줄 알고 열심히 살았는데 나중에 보니 고통과 슬픔만 남았습니다.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는데 배신과 실패와 두려움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속입니다.
인생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가야 합니까?
우리가 믿고 따라갈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만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나의 행복, 나의 영원한 미래를 위해 자기 전부를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우리가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찾고 있지만, 이 세상에는 참사랑이 없습니다.
요즘 사방에서 들리는 소식은,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사악한 종교지도자들의 범죄며, 머리 나쁜 정치지도자들이 백성들을 고통하게 합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 조차도 잘못 눌렀다가는 인생의 폭탄으로 변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벌써 우리를 사랑하셨고 십자가에서 날 대신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10:11절에 보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세상에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유일한 길이요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이것 하나 때문에 인생의 모든 길이 다 막히고 말았습니다.
붙잡혀 매를 맞고, 굶주린 짐승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지고, 저주거리로 전락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사도바울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믿음의 길은 어렵다고 멈추거나 뒤로 물러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어려울수록 앞으로 나가고, 고통스러워도 앞을 향해 나아가면 모세처럼 새힘을 얻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성도가 가는 신앙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두 번째로, 그것은 소망의 길입니다.
23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이 땅에 살면서도 늘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늘나라의 영원한 축복을 사모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도 소망을 가진 자의 삶과 그렇지 못한 자의 삶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소망을 가진 자는 고난 중에도 확신이 넘치고, 힘이 있고, 감사와 기쁨의 노래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소망을 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어버린 자는 연약하고 확신이 없고 주위 사람들까지 고통하게 만듭니다.
예수를 믿어도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재미를 모릅니다.
낙심을 잘하고 늘 교회 안에서 문제 거리만 만들어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천국 시민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소망은 배의 돛대와 같습니다.
그것을 높이 세울 때 우리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을 의지하여 자기가 원하는 소원의 항구에 들어가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돛 대신 힘써 노를 저어가야 하므로 삶이 피곤하고 괴롭고, 모든 것이 짜증 나고 피곤할 뿐입니다.
여기서 굳게 잡는다는 말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 굳게 잡은 상태를 말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사모하며 소망의 닻을 높이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 성령의 바람은 우리를 소망의 항구로, 영원한 나라에 속히 이르도록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5.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성도가 가는 신앙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세 번째로 그것은 사랑의 길입니다.
일본의 세종대왕 같은 임금인 성덕태자는, 아스카시대(574-622)의 사람으로 일본의 종교, 정치, 학문 등의 모든 면을 정비하여 국가다운 일본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17조 헌법을 제정했는데, 그 첫째가 사람과의 관계를 사이좋게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가 신앙심을 고양하라는 것과, 셋째가 천황을 잘 섬기고, 넷째가 관리들이 예절을 다해서 백성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이 17조 헌법을 자세히 보면, 사람이 첫째요 그다음이 신앙이요 그다음이 법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온갖 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가 스스로 그 법에 걸리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사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제일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법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대신 분쟁하고, 이해하는 대신 미워하고, 끊임없이 사람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진정한 사랑은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6. 대하 28장에서 유다 왕 아하스는 성전 문을 닫고 이방신을 공개적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악함은 사랑하는 아들까지 불에 태워 이방신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왕을 아람 나라의 군대에게 붙여 심판하셨고, 나라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16년간은 유대 땅에는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중에 태어난 히스기야는 아버지의 길을 가지 않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굳게 닫힌 성전 문을 열여 성전을 수리하였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불러,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모든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마침내 히스기야는 나라와 민족에게 영적 부흥을 일으켰고, 이스라엘을 새롭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하였고, 저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황폐한 나라와 민족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믿음을 바로 세우고 영적 부흥을 통해서 나오는 줄 믿습니다.
7. 그런데 오늘 우리 시대가 사랑을 잃고, 고통과 혼란이 가중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고,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영적 타락은 제일 먼저 우리에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빼앗아 갑니다.
25절에 보면,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귀찮게 여기고 있습니다.
말씀 배우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을 억울하게 손해 보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마귀는 성도들의 진정한 보화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송두리째 파괴하려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절에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담력을 얻는 것같이, 마귀도 멸망할 사람들에게 불신앙의 담력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못된 길을 하고 행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8. 그러나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예수 믿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 인생과 천국 가는 여정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집에 모여 예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것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낙원교회의 단기선교팀과 함께 예배하는 이 예배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보통 교회가 건축하는 중에는 하던 선교사역도 쉽니다.
그러나 일본을 가슴에 품고 선교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하실 때는 반드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십니다.
이때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결심하면, 하나님은 전무후무한 축복을 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물론 사단의 공격은 더 거세지고 연약한 사람들이 시험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모이면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성도 간에 사랑의 떡을 떼고, 그리고 바깥으로는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로 나아갔더니 순식간에 소아시아에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도 굳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나아가야 하는 가장 좋은 길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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