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마태복음5:10-1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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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의를 위하여(마태복음5:10-12/2023.10.8.오후)
1. 성도들의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습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도 본 받으라고 하면 충격을 받는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왜 우리가 또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셨다고 했는데.
고후8:9절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또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하고, 또 예수님처럼 가난해야 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인가?
세상 사람들을 살펴보면 정말 행복한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 두려움과 고통과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면서 당하는 고난은 잠시 잠깐이고, 그 후에는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11절에 보면, "나로 말미암아" 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의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다.
6절에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목말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 이름에 목 말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사모하고, 하나님 아들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다는 말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지나치게 사모하여 힘들어하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2.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란 무엇인가?
나만 사랑해 주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도와줄 자를 찾는다.
그런데 요14장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12)라고 하였고,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고 하시면서, 또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16)겠다고 하셨고, 마침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고 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하셨으니, 우리에게 예수님같으신 분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라 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확실하게 안다면, 목이 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듯이 그렇게 갈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먹이를 주면, 개는 그릇에 담긴 먹이를 다 먹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
이미 그릇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그곳에 혀로 수십번 수백번 핥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지만, 조금 전까지 그곳에 있었던 맛있는 먹거리를 상상하면서 핥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안다면 우리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이다.
3. 우리가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이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셨고, 모진 고문과 고난과 살을 찢는 십자가의 고난을 우리 대신 당하셨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세상 성공은 꿈도 꾸지 못하고 한결같이 순교 등으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왜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첫째는, 그리스도를 따라는 사람들의 삶과 세상 사람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각이 그 사람의 행동이나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반드시 상응하는 결과가 따라온다.
골3: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고 하였다.
우리가 원하고 찾고 사모하는 것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 저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4절에 보면,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고 하였기 때문이다.
4. 두 번째는 하나님은 순금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한국에 시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공인된 사람만 5만명이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반 이상은 이름뿐이라는데, 제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더더욱 적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이름뿐인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다.
이런 가짜를 분별해서 가려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시는데, 마25:31-33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고 하였다.
우리 가운데 스스로의 능력이나 공로로 천국에 들어갈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그의 공로에 힘입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영광이나 의로움을 가짜에게 나누는 것을 매우 싫어하신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이유는 자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그들이 가로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고,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 것인데, 이 일을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고난과 박해를 통해서 참되고 충성된 자를 구분하시는 것이다.
5. 그렇다면 무엇이 의를 위해 당하는 핍박인가?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예배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드렸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려고 죽음을 무릎쓰고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생명을 걸었고, 죽기까지 이 일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지해서 살았고,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많은 수의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것이다.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세계에서 이 신앙 하나 때문에 수천만 명이 고난을 겪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시대나 로마의 네로 황제의 핍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과 영적인 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이 기독자를 어떻게 핍박하고 있는가?
11절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억울하게 당하는 일,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괴롭힘 당하는 일, 거짓된 말과 증언으로 고통을 당하는 일, 예배 때문에 전도나 기도 생활로 인해 당하는 온갖 어려운 일로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박해를 받을 수 있다.
6. 문제는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12절에 주님은 우리에게 그 답을 주셨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고난이 오고 박해가 시작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예수 때문에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고난이나 박해를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늘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크다는 표현은 우리 인간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롬8:18절에서,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 하였다.
이 말씀은 내가 당하는 박해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과분하고 큰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이 약속하시고 주시는 상은 공로를 따라 주시는 상이 아니라 은혜의 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참았을 뿐인데, 눈곱만큼 희생한 것뿐인데, 세상 사람들이 치르는 희생에 비하면 1/10도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세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상을 주시는 이유가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7.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인생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손해 보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않는다.
성공도 실패도 가진 것도 다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영원한 영광을 사모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환란도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는 이 길은, 예수님도 가신 길이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간 길이고,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 순교자들이 간 길이다.
우리에게는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미래를 바라보며 언약 안에서 믿음의 길을 걷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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