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신명기32:15-25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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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여호와의 불(신명기32:15-25/2024.1.14.오전)
1. 현대 금융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진 미국의 죠지 소로스(George Soros,93)를 가리켜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 보다 수십 년을 앞서 살아가는 금융계의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최근까지 쌓아 올린 부가 무려 25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일본 엔으로 환산하면 35조 엔으로, 이것을 37살의 셋째 아들에게 물려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온종일 해도 모자랄 정도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그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는 다른 부자들과는 생각이나 관심이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옷이나 음식, 자동차나 집은 물론이고 취미생활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지만, 소로스는 그런 데는 전연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산이 아무리 늘어나도 평범한 작은 집에서 살았고,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와 스키를 타는 정도로, 호사스러운 취미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행한 일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산의 80%를 자선 재단에 기부하였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열심이었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늘 시간만 나면 깊은 생각에 잠겼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세계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힘이 그를 세계적인 거부로 만들었고, 금융계의 예언자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AI라고 하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과학은 사람들로부터 이런 생각의 능력을 빼앗아가 가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현상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분야에서 무엇을 하던지 어떤 직업을 가졌던지 상관없이 일단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성장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퇴보뿐이고, 결국 기계문명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비단 오늘 우리의 시대뿐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인류 역사를 통해서 반복됐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현상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2. 오늘 본문의 서두는 이스라엘을 여수룬이라고 부르면서 시작하고 있는데, 여수룬은 올바르다는 뜻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스라엘이라는 족속은 원래 어떤 존재였습니까?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면,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던 여호와 하나님과는 전연 상관이 없던 데라라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그를 축복하시며 언약을 주셨고, 그는 이 약속을 믿고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가나안 땅을 향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창12장).
그러나 세월을 거치면서 그의 자손들은 애굽의 노예로 전락했고,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의 삶을 감내할 수밖에 불쌍한 족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세상이 말하는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긍휼로 덮으시고 종이 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목적은 단순히 노예의 멍에와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놀라운 축복과 아름다운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면, 자신들을 낳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발로 차 버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발로 찼다는 말은, 야생마나 포악한 짐승이 뒷발질을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에서 살찌고 비대해지고 윤택해졌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풍요로움이 그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었고, 구원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3. 본문 15-18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상이 기록되어 있고, 19-25절까지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은 인간의 교만한 마음입니다.
이 교만한 마음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고통하게 만들고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드러낸 그들의 죄상이 무엇입니까?
16절에 보니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 하였다고 하였고, 17절에 가서는,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반석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우상과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이스라엘의 마음을 마귀나 귀신에게 바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1절에 보니, 이스라엘은 더 이상 내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5절에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에게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가장 불행한 것은, 부모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직 부모님의 보호와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할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4. 문제는 사람이 물질의 풍요로움에 빠지면 예외없이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홍해 가운데로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아무런 힘도 없고 무가치한 우상에게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올리며 복종을 맹세하였으니, 이런 자녀를 바라보아야 하는 부모된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해서 아무것도 베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섬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권세로 살 수 있으며(요1:12), 그곳에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넘치기 마련이기 때문에, 비록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과 귀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23-24절에 기록된 것처럼,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여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들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냄" 으로 삶이 지옥처럼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인의 구원을 일으켜 이스라엘의 질투를 일으키겠다고 하였으니, 그들은 이방인의 구원을 보면서 매일 분노와 고통 속에서 살도록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 사람들은 자비로운 하나님, 권능의 하나님을 버리고 허무한 우상에게 굴복하며, 더러운 죄 가운데 빠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11:25절에 보면, 죄악의 낙을 누린다는 말이 있는데, 죄가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지는 이유는 우상이 가져다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의 매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마음껏 드러내고 누리는 것입니다.
온갖 탐욕과 추악한 것과 거짓된 것 속에는 사람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죄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끊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감사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처럼, 죄가 가져다 주는 즐거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롬7:6)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은 결국 사망을 낳는다는 것입니다(롬6:23).
대하26장을 보면, 아마샤의 아들인 웃시야가 16살에 유대나라의 왕이 되어 52년간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으로 국력을 강화하고 주변 나라와 민족을 쳐서 그의 명성이 애굽 땅에 까지 알려질 정도로 영향력이 컸지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점점 마음이 교만해졌고, 그 결과 왕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 즉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을 제 마음대로 행사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문둥병의 저주를 받아 평생 숨어서 고통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신앙이란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으시길 기뻐하시는데, 그 마음을 돌려 헛된 것과 악한 것에 사로잡히게 되니, 감사와 찬송과 기쁨이 나오던 그 마음에서 이제는 불평과 원망과 시기와 악독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6.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빌4:12) 다고 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과 같은 고통에도 감사할 줄 알고, 가나안의 풍요로움과 같은 생활 속에서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육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쾌락주의의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이 일을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빌립보서에는 기록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고 하였습니다.
저의 경험으로는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번영을 이루고 있지만, 기독교 신앙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렘17:9-10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도 없고 뜨거운 감사도 없고, 복음에 대한 열정도 식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며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이니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다가, 그가 우리를 오라 하실 때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7. 이 신명기 32장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예언의 말씀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런 길을 갈 것이고, 거기에 대한 행위의 대가로 내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결국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가 반복해서 일어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행위를 고칠 줄 몰랐던 것입니다.
풍요로움이 그들의 생각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B.C 933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다가, B.C 721년에 북왕국이 먼저 앗수르의 손에 무너지고, B.C 606년에 남왕국 유다가 신흥제국 바벨론의 손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22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진노의 불이요 질투의 불이요 심판의 불입니다.
이스라엘은 노예의 삶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을 누렸으니 이것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에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자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원하는 것을 얻고 가장 좋은 것을 누리게 되니,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귀한 존재로 보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육체를 더 신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심판의 불이 임한 것입니다.
심판의 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누리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어렵다고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성공했다고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고 영원한 성공인 줄 믿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아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하였으니, 이런 축복과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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