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11:25-3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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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로마서11:25-32/2024.6.9.오전)
1. 빙점(氷点)의 저자인 미우라 아야꼬(三浦綾子1922-1999)의 글에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본래의 말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었고, 그래서 태어나는 갓난아이 50명을 모아서 실험했습니다.
보모들이 아이들을 양육할 때,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고 감정을 표현해서도 안 되고 아이들을 만져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결국, 말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었고, 사랑의 보살핌 대신에 기계적인 관리 아래에서 양육되면서 아이들은 점점 쇠약해져서 마침내 모두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실험이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생사의 문제임이 밝혀졌습니다.
미우라 아야꼬의 글을 계속됩니다. 일본이 패전한 후,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다 보니 젊은 부인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면서 몸은 부서지도록 일만 하다 보니 결핵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결핵에 걸리면 사람들이 만나기를 피하고 멀리서도 도망가던 그런 시대였기 때문에, 병든 부인들이 입원하면 처음에는 남편들이 열심히 문병을 오다가도 점점 발길이 뜸해지다가 1년쯤 지나면 이혼장을 들고 오는 것이 예사였다고 합니다.
병든 부인들은 아무 쓸모도 없는 며느리고 아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한밤 중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녀들은 울고 또 울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연약해지고 아무 쓸모도 없는 그런 상태에 빠져 있을수록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고 위로하고 소망을 가지고 투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2. 미우라 아야꼬 자신도 결핵으로 인해 오랜 세월을 병상에 누워 있었으니 그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의 세월을 통해서 그녀가 깨달은 것은, 한 번도 시련을 겪어 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하거나 생이별을 당해보지 않고, 늘 건강하여 질병으로 쓰러진 적도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나는 눈물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고, 남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롬12:1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이 말씀의 의미도 나는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병들고 버림당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 아픔을 오히려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고통의 세월이야말로 많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병든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또한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안다는 말처럼, 내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해 보고 나면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움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원치 않는 질병이나 인생의 실패며,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주셔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이고, 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웃에 대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3.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내용으로,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 인해 유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유대인의 상황을 사도바울은 11절에서 표현하기를 실족이라고 하였고, 12절에 가서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었" 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아니라 일시적인 넘어짐, 즉 실족이라고 함으로 그 관계가 끝장이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실족을 통해서 이방인에 대한 구원의 기회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마치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 성장해온 나무가 밑둥치부터 잘려나갔지만, 어느 세월에 다시 그곳에서 새싹이 돋아나 새생명을 누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여러번 강조하면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4. 본문 30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은지라" 고 함으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말씀하고 있고, 31절에 가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같은 긍휼을 말씀하시고, 32절에 가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긍휼을 베푸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긍휼이라는 말은 가엽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단어는 헬라어로 엘레오스 라고 하는데, 이것은 깊은 공감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창조주 여호와가 피조물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렘31:20절에 보면,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 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고 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법을 어기면 정죄를 받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은 공정한 일이고 사회적인 공의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대로 한다면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더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우리 가운데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심판을 받고 죗값을 치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법을 뛰어넘고 이 법을 멈추게 만드는 것은 죄인이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고 하셨습니다.
긍휼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가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보다 더 뛰어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5. 그런데 긍휼과 정반대의 마음이 본문에 나오는데, 그것은 25절에 나오는 우둔함입니다.
이전 개역성경에는 이것을 완악하게 되었다고 기록하였고, 일본어 성경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
는데, 돌멩이처럼 딱딱한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해석을 가지고 저는 생각하기를, 지적인 식별에서는 우둔해지고, 마음으로는 완악하게 되었다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11:8-9절에서 그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그런 의미로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가정의 식구들이 제 표현에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으며,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인데, 이러한 불신의 근본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고 지적으로 우둔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믿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분별력이 있어서 마음이 부드러워서 먼저 믿고 구원받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도 강퍅하고 어리석지만 성령님이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깨닫는 영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제 혼자 잘나서 성공한 사람도 없고 못나서 실패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따라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녹이고 고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뿐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잠시잠깐 유대인의 마음을 강퍅한대로 내어 버려두셨고, 그 긍휼하심이 우상과 정욕에 찌든 이방인된 우리의 마음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본문 25절의 내용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으면, 그때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행하신 것과 똑은 방법으로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6. 시103:13절에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죄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는 긍휼의 하나님으로 어떤 죄인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분인데, 우리는 이웃이나 믿음의 형제들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보여주기보다는 법대로 하려고 하고, 막상 내 자신이 법이나 규칙에 저촉되는 문제를 만났을 때는 주위 사람들에게 긍휼과 용서가 없는 것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1863~1945)이라는 목사님을 가리켜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 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회자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전임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2차대전에 참전하여 훌륭한 전공을 거두고 국가로부터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늘 마음에 떠나지 않는 갈등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 불과 17살 정도의 어린 적군을 죽인 것이 마음에 걸려 고민하다가 이 문제를 가지고 군목을 찾아갔습니다. 군목은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며 받은 훈장이 마음에 걸리면 돌려주라고 했지만, 마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다른 군목을 찾아가 다시 상담했지만, 더욱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라는 말을 듣고는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다른 군목을 찾아가서 상담하는데, 오랫동안 켐벨의 아아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오랫동안 꼭 껴안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켐벨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그래서 돌아가려고 문을 열 때 그의 등 뒤로 군목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때 켐벨의 마음에는 참 평안이 찾아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7.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내 뜻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을 때는 반드시 그곳에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분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그래서 우리가 방황하고 고민하고 시험에 빠지기도 하지만, 나는 다 알 수 없고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질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시69:4절에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까닭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 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고 하면서 자신의 억울한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에게도 다윗과 같은 이런 억울한 경험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이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러나 내 평생에 나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긍휼하신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도 다윗처럼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긍휼하신 그 마음에 담긴 깊으신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어도 이미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5:8)다는 이 말씀이야말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죄인을 향한,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마음인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터는 우리가 이 긍휼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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