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13:8-1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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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마서13:8-11/2024.9.1.오전)
1. 미국 최고의 의사에 11차례나 선정된 세계적인 암 전문의인 김의신 박사의 인터뷰가 며칠 전 조선일보 인터넷판에 실렸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암을 유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스트레스라고 하면서, 한국인 4명 중에서 1명은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그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담배, 소주, 삼겹살을 섭취하는데 이것들은 도리어 스트레스를 악화시킨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욕심이 많다고 하면서, 그러나 욕심은 상대적인 것이라 경쟁 사회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행복해지려면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과 습관이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미국 사람들은 암에 걸리면 고혈압이나 당뇨 등의 만성질환처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한국 사람은 암에 걸리면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 질병의 원인은 자신이 관리를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병에 걸렸다고 해서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지거나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먹기에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6:25-34절에서 의식주 문제와 많은 인생의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염려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니 하늘의 새와 들의 백합화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5:7)고 하였습니다.
2.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미래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많은 문제로 고통받는 인생에게 행복하고 감사가 넘치는 모습으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서 다섯 번씩이 반복되고 있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이웃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빚 이외에는 빚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면 율법을 다 이룬 것이 된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랑이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사랑의 빚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빚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금전적인 빚을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쉬운 소리를 하며 남들에게 돈을 빌릴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빌리 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속히 빚을 갚겠다는 마음이지만, 막상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그때부터 빌린 사람은 상전처럼 되고, 빌려준 사람이 구걸하는 처지가 되기도 합니다.
심하면 빌린 돈을 떼먹고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예도 있고, 반대로 빌린 돈의 이자로 인해 인생이 파산당하고 한 가정이 공중분해 되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돈을 잘못 빌려주거나 또 빌리게 되면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돈거래를 하게 되면 더 큰 어려움과 부작용을 만나게 됩니다.
요즘도 고리대금업이 성행하는데 로마 시대에는 이런 일을 주로 유력한 정치가들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연간 금리를 12%로 제한하여 채무자를 보호하는 장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바울의 의도하는 바는, 금전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빚에 대한 것입니다.
3. 사도바울이 사랑에 빚을 이야기하는 것은, 받은 사랑에 대하여 부채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그렇고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이나 스승님에게 받은 은혜나 사회의 약자나 어려움 당하는 자들에게 베푸는 도움 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어떤 것이길래 받은 사랑에 대해 채무자의 심정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부채의식은 이런 것을 뛰어넘어서, 죗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저주에 사로잡힌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부어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치러야 할 죗값을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치르시고 죽으셨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말로만 용서한다고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행동으로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말씀으로 온 우주와 천하 만물을 만드셨으니,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며 변함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성품이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용서를 베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 공의로운 일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용서의 대가로 가장 값지고 소중한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사도바울은 고후5:2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과 또한 죄인된 우리를 단순히 용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영광의 도구로 쓰임을 받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사도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니라"(1요4:11)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에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금전적인 빚을 졌으면 최선을 다해 빚을 갚아야 마땅하듯이, 사랑에 빚을 졌다면 이 또한 최선을 다해 사랑을 되갚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타락이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자기중심적인 욕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렇게 죄에 빠진 인간은 사랑은 고사하고 선을 행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웃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으며, 내 안에 여전히 정욕과 불의가 가득한 채로 어떻게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의 형편은 아랑곳없이 더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약2:20절의 말씀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말로만 사랑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마음에도 없는 억지 사랑을 해야 합니까?
5. 우리가 말로만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한다면,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그 사랑을 우리도 본받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눅10:25-37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듣는 중에 어떤 이가 질문하기를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은 누구냐가 물었을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들려 주셨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방인이라는 차별과 모욕을 받던 한 사마리아 사람은, 같은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다 빼앗기고 맞아서 죽어갈 때 제사장도 레위인도 모른척 비켜 갔지만, 그는 다가가서 그를 구해주었고 깨끗이 치료되고 회복될 때까지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도 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고전2:16절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 하였고, 빌2: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으니, 이웃에게 사랑을 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우리의 환경이나 내가 가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주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주님과 전연 다른 마음과 생각을 품고 있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6.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고 우리 위에 부어진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믿음의 형제들과 우리의 이웃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5:6절에서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믿음에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이 우리 심령에서 역사할 때, 우리의 믿음은 완성을 향해 성숙해 간다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서로 사랑하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의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간음을 일상의 스포츠나 오락쯤으로 생각하고, 분노를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살인까지 서슴지 않으며, 도둑질은 범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만일 그들에게도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 마음에 사랑이 없어서 이런 죄를 아무렇지 않게 행한다고 하면, 그들이 이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배고픈 사람이 참지 못해서 도적질을 한다면, 누군가가 먹을 것을 그에게 준다면 허기진 배를 채위기 위해 더 이상 도적질을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이웃에게 온갖 악을 행하는 이유는 그들 속에 정욕은 가득해도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가 사랑에 허기진 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영원한 사랑을 입었고 사랑의 마음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7. 요13: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 제자의 핵심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된 관계에 있었을 때 먼저 찾아오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힘으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어도, 하나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을 믿고 확신한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을 온전히 지킨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면 이 모든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한 자가 된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은총이고 축복입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생긴 질병도 물러갈 것입니다.
내 안에 부은 바 된 주님의 사랑을 남들을 위해 사용하면 염려 근심은 물러가고 평안과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재앙과 고통과 저주에서도 우리에게 참 승리와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사라져도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영원한 줄 믿습니다.
인생의 참 행복을 원하십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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