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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요한계시록 11:14-19)
고영수 2020-05-10 추천 0 댓글 0 조회 476
[성경본문] 요한계시록11:14-19 개역개정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16.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던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하나님 앞에서(요한계시록 11:14-19/2012.6.3.오후)

1. 성도, 혹은 기독교인으로 불리는 우리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몇 가지의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의 존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다른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모든 사역에 대한 관심과 통제와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읻것은 우리의 지향하는 목표나 관심이나 모든 삶의 수단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있는 존재요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고백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 귀중한 인생을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까?
그 분이 먼저 날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한 댓가를 치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자신을 가리켜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값으로 산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한가지의 중요한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미래를 지향하는 것은 동일할지라도 그 방향과 방법이 전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선지자들과 믿음의 선배들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생을 넘는 저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계획이 전연 없습니다.
오직 육체로 사는 세상이 천국이요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한 미래를 위해 인내하거나 자신을 절제하거나 내세를 위해서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끝나는 죽음이 두렵고 할 수만 있으면 지상에서의 삶을 연장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이생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8:18)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날과 받을 영광을 위해 인내하고 수고하기를 기뻐하는 줄 믿습니다.

2. 본문의 서두에 둘째화가 지나갔다고 했는데, 이것은 7장에서 종결된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16-18장으로 이어지는 셋째화의 예고를 알리는 천사의 나팔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요한이 본 이 하늘의 광경은 마치 4-5장에서 본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것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을 향한 찬양과 경배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되었던 우리들을 위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모든 성도들이 24장로와 더불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5:12)세세토록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시 본문에서 재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늘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백하기를,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을 떠날 수도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존재인 것은 하나님이 만물에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결정적인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분에게 세세토록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를 올려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며, 우리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이 거룩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하늘나라에 가는 줄 믿습니다.

3. 장로교 창시자인 칼빈의 모토는,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포함한 모든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사는 이유는 그들 앞에 아무도 없으며, 거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제 스스로이며,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계속된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날수록 그분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되고, 그분의 계획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리고 알면 아는 만큼 우리의 불신앙과 고집과 편견들, 그리고 교만한 마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존재요 하나님을 만나는 만큼 우리는 가치있고 존귀한 삶을 사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갈멜산의 엘리야와 대결하던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선지자들처럼 자기들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자기 신을 향하여 예배하고 기도한다 할찌라도 변화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만나는 신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많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그들의 믿음이 강해진다고 해도 그 강해진 믿음으로는 절대 사람이 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시139:2-3)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우상같은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천하 만물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를 만드신 살아계신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4. 본문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면 이외에 또 무엇이 나옵니까?
불신앙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롭고 거룩한 자들에게 상주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상이 주어진다는 것은, 복음전파로 인해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수가 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와 자비를 가지고 기다리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면적인 심판, 즉 악한 자들의 심판이 이미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나팔소리는 최종적인 재앙을 알리는 신호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들의 사명이 완성되었음을 말합니다.
먼저는 불신앙의 무리들과 더불어 거짓선지자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 그리고 사단과 음녀들을 심판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란 바로 이들을 말합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내용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죄악과 불신앙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고, 그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입니다.
18절에 보니 그들의 분노에 하나님은 더 큰 분노로 심판하고 계십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고통하게 만들고 무엇이 사람들로 심판대 앞에 서게 만듭니까?
불신앙입니다.
결국 같은 말일수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불신앙입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신앙 하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죄와는 차원이 다른 영적 도전입니다.
불신앙 속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리석은 용맹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5. 그리고 두 번째 나타나는 광경은 믿음으로 의에 이른 의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을 향하여는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지만 이 사람들을 본문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2-3장을 통해 소아시아의 고난을 당하는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권고를 보았습니다.
신앙을 지키고자 함으로 당하는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주님은 보셨습니다.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 순교자를 내어주어야만 하는 교회의 아픔을 보고 계셨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모습에서 주님은 동병상린의 아픔을 맛보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당하신 아픔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셨지만, 마지막 까지 인내하심으로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야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2:2-3)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고난을 알아주는 것만으로 우리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이 됩니다.
여기 영광의 상을 받는 자들은 다 주님 때문에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소망이 오직 주님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예배와 찬양이 더욱 값진 것입니다.

6.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요한계시록은 두렵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가득차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주제로 기록된 책이나 예술 작품들은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이것은 내용을 잘 모르고 오해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밧모섬에 귀향한 사도요한처럼 고난당하는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위로의 말씀과 소망의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말씀 못지않게 아름답고 보배로운 말씀이요, 특히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더없이 복되고 소망스러운 말씀인 줄 믿습니다.
어떤 환란과 고통이 와도 주님 앞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어린양을 향한 찬양과 예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양 빛에 반사되는 달처럼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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