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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신부(계시록 19:6-10)
고영수 2020-05-19 추천 0 댓글 0 조회 536
[성경본문] 요한계시록19:6-10 개역개정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신부(계시록 19:6-10/2016.9.4.오전)


1. 요한계시록은 고난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종말의 혼란스러운 현상이나 무서운 심판에만 집중하게 되면, 이 말씀을 강론하는 자나 그것을 듣는 자들이 잘못된 곳으로 흘러가기 십상입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 속에 있었는가를 안다면, 고난당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이 왜 이 말씀을 주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서 이 계시록의 말씀을 다시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큰 위로와 남다른 은혜인 줄 믿습니다.
20세기를 살던 사람들은 다음세기가 오면 이 지구촌이 대단한 유토피아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를 들어와 보니 그들이 꿈꾸었던 미래에 대한 꿈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그들이 가졌던 소망과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21세기를 들어와서 벌써 15-6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때인 인류의 종말이 더 가까이에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법도 질서도 소용이 없고 인정사정도 없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오죽하면 망하고 싶으면 착하게 살고 법을 지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힘 있는 사람이나 남 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나 제 뜻대로 살아갈 수 있으며, 이런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회의 공의나 정의도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도 없이 똑똑해서 말 잘하고 큰 소리치는 힘이나 숫자가 많은 사람들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부흥은 어렵고 전도의 열매를 맺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고 가르쳐주셨지만, 세상에 빛 되고 소금 될 만한 신자는 점점 찾기 어려워지고, 교회 안에는 정신병자들만 점점 늘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2. 이러한 위기와 고통 속에서 우리가 믿음의 반석 위에 서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제 믿음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인류 역사에 종말이 와도 두려움이 없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중요한 흐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는 물론이고 종말의 역사는 전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며, 그러므로 이 모든 종말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위한 사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범죄자들에게는 심판을, 고난을 이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영광과 안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환란 당하는 지상교회에게는 확실한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환란 가운데에서의 소망의 복음이요, 이것은 핍박 가운데서의 기쁨의 복음이요, 이것은 고통과 두려움을 주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계시록 안으로 들어감으로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영원한 위로와 기쁨과 소망을 얻는 줄 믿습니다.

3. 삿16장에 보면 천하장사 삼손의 사랑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손이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있는 소렉 골짜기에서 들릴라 라는 한 블레셋 여자를 만나게 되고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들릴라는 세실 B 데밀 감독이 만든 삼손과 데릴라 영화 이외에도 1968년도에 가수 조영남씨가 미국의 탐 존스가 불렀던 딜라일라를 번역해서 불렀던 노래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삼손이 한 여자를 사랑하는 사랑의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삼손이 이 여인을 사랑하면 할수록 고민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하루가 행복하고 꿈같은 시간이 되어야 하는데 삼손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16:16절에 보면 들릴라를 사랑할 때의 삼손의 심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제가 일본에서 오랫동안 지내면서 가만히 보면, 여자들이 결혼해서 남자의 골수를 빼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의 재산을 한국의 시집에 다 퍼다 주거나, 빠찡고나 도박이니 술에 탕진해서 재물도 건강도 인생도 탕진하면서 남편도 망하고 자신도 망하는 그런 여자들이 있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돈 보고 결혼하는 남자들도 있고, 여자의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연약한 여자의 인생을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배신하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 사람들의 사랑이 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랑에 자신도 속고 상대방도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속이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남편과 아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주고 베푸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되신 예수님이 신부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처럼 그렇게 희생하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삼손과 들릴라의 사랑은 어떤 사람입니까?
계산된 사랑이요 잘못된 관계에서 출발하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누가 해도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세상을 더 많이 사랑하면 고민도 많고 고통도 많고 질병도 많은 법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되면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제가 볼 때에는 다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야 할 사랑이 더 고통스럽고 점점 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괴로운 것입니다.
    
4.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세상의 현실과는 정반대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들이 경험하게 될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7절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어린양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의 신부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신부는 돈이 많거나 유명한 집에 시집간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의 행복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나를 사랑하되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그것이 행복하고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19장에 들어와서 두 번째 할렐루야가 울려 퍼지면서 모든 사람들과 천사들이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혼인잔치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신부를 위해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서 준비한 것을 주시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이라 했습니다.
문제는 어째서 이 세마포 옷이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신랑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를 신부가 받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8절의 말씀이 간단하게 해석되어질만한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신랑이 신부를 위해 예비한 드레스를 가지고 성경 스스로 해석하기를 이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5. 인류의 역사 이래로 인간의 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인간의 그 어떤 공로를 가진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 되었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에, 그 분의 공로로 우리는 죄 씻을 받아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여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본문 7절에 기록된 그의 아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신부는 다름 아닌 이 지상교회의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 주심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셨는데, 본문에 보니 어린양 혼인잔치를 앞두고 자신의 영원한 아내가 될 신부에게 다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셨으니 과연 이 옷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하여 이것저것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는 이 행실은 헬라어로 “디카이오마타” 인데, 이것은 “디카이오스”에서 온 것입니다.
디카이오스는 요세푸스나 필로 같은 역사학자들이 구약성도들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뜻은 선하다, 올바르다, 법적이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게 등을 저울에 달아 볼 때에 정확하다는 것과, 물건에 대하여 바르다, 혹은 땅이 비옥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합법적이거나 올바른 것, 가치가 있는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딛1장에서 감독들의 기준을 말할 때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그의 아내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님을 단순히 결백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빌라도나 백부장의 고백에서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예가 있지만 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6. 문제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주인공으로 청함을 받은 이 신부에게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혀 주셨다고 하면서, 왜 그 세마포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로 해석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행3:14-15절에서,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고 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뜻을 이루시는 메시야를 나타낼 때 그분의 의로움에 대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 이란, 생활 속에서 도덕적으로 선하고 의로웠던 그들의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고 믿음으로 승리한 이 지상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온전히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온갖 유혹과 고난 속에서도 더럽혀지지 아니한 신부의 순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7절 마지막에서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다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양 혼인잔치에서 맞이할 사랑하는 신부를 위해서 신랑은 자신의 생명과 육신을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내어 주었기 때문에, 이 사실에 대하여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부역시 신랑의 아낌없는 사랑과 그 고귀한 희생을 입었기 때문에 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하여 그 어떤 타협이나 물러섬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상 교회는 영적 전투에서 자신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의 순결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고,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7. 1697년에 프랑스의 동화작가 사를페로가 펴낸 영원한 명작 신데렐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귀족의 딸로 태어난 착한 신데렐라는 친 어머니를 잃고 난 후에 새엄마와 두 배다른 두 언니의 학대로 하녀보다 더 못한 학대를 받으면서 하루 하루를 어렵게 살던 중에, 요정의 도움을 받아 자신도 아름답게 치장을 하고 왕궁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왕자의 마음에 들었지만 마술이 풀리는 시간이 다가오자 유리로 만든 신발이 벗어진 줄도 모르고 도망쳐 왔고, 신데렐라를 잊지 못하는 왕자가 전국에 유리 구두의 주인공을 찾던 중에 왕자는 그녀를 만나 결혼해서 왕궁에서 죽을 때 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비록 가난하고 천대꾸러미로 살았지만 왕자와 결혼함으로 왕자가 가진 모든 권세와 부귀영화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중심에는 유리구두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 핵심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위해 신부된 성도들이 입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문제는 이 세마포를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22장의 혼인잔치의 세마포 비유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자들이 어찌 되었습니까?
바깥 어두움 가운데 쫓겨나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양 혼인잔치에는 누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부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온간 고난과 유혹과 핍박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신의 순결을 지킨 교회, 신랑을 맞이하기에 부끄럽지 않는 순결한 신부 같은 성도만이 주님이 준비해 주신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의 자격으로서 들어가는 줄 믿습니다.

8.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지상교회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고난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주님의 몸된 지상교회도 그 가는 길은 광야와 같은 세상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핍박과 유혹이 늘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땅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에 있으며, 우리를 기다리며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계시는 우리의 신랑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을 잃지 않고 고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킨다면 신데렐라가 누리는 행복과 축복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위로와 축복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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