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계시록20:1-6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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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2.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천년왕국의 권세를 받은 자(계시록20:1-6/2016.10.2.오전)
1. 중국의 5대 경전 중에 하나인 서경(書經)에 보면 인간이 살면서 누리는 다섯 가지의 복을 논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천수(天壽)를 다 누리고 가는 장수의 복을 으뜸으로 쳤고, 둘째가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복이고, 셋째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강령(康寧)의 복이고, 넷째가 남에게 베풀고 덕을 쌓는 선행(善行)이고, 다섯째가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여 고통이 없이 일생을 평안하게 마치는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수라고 하면 하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생명의 길이를 말하는데, 과연 얼마만큼 살아야 천수를 누리는 것이고 장수하는 것인지 답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도 보면 선을 행하면 장수의 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고(신2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잠10:27)한다고 하였는데, 창세기에 보면 에녹의 아들인 무드셀라는 무려 969세를 살다가(창5:30) 노아의 홍수 직전에 죽었으니, 거의 천년을 살다 간 셈이니 이 사람보다 더 장수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속담에도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개처럼 천하게 살아도 죽는 것 보다 낫다는 의미이니, 생각해보면 다들 천년이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이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계시록 20장을 보면 2절부터 7절까지 천년이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천년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지상천국인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어쨌든 천년, 혹은 천년왕국 이라는 이 말이 장수를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내용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천년이라는 시간의 단위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하거나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천년이라는 기간을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느끼고 있는 문자 그대로의 천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요한계시록에서 많은 것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 이 천년을 불특정의 오랜 세월의 기간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천년왕국이라는 것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견해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가 인식하고 있는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3-4가지의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후천년설이 있는데 이것은 천년왕국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 학설입니다.
이것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위상이 높아져서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기독교 황금시대를 이룰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둘째는 무천년설이 있는데 이것은 본문의 천년이라고 하는 이 기간을 상징적인 시간으로 보고,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해 재림 때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왕국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셋째는 전천년설이 있는데 이것은 다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 역사적 전천년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3.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역사의 마지막에 7년간의 대환란이 있으며, 이 때 성도들은 환란을 보지 않고 휴거하여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주님과 혼인잔치를 마친 후에 다시 이 땅에 내려와서 주님과 더불어 천년왕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성경의 해석을 문자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전천년설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면서 대 배교와 대환란이 일어남으로 성도들이 환란 가운데 많은 고통을 당한 후에 사단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지고, 그 때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의 학설은 어느 것 하나 성경에 비추어서 여러 가지의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과 많은 주제를 놓고 말씀하셨지만,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을 해석하는 일에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지만, 기독교와 그에 따르는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무천년설이 설득력이 있으며, 일제와 공산주의를 통해 박해를 받은 한국의 경우에는 전천년설을 올바른 해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계시록 20장의 내용은 학문적으로 해석하기가 가장 어려운 구절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면 마치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정해 놓고 논쟁하며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처럼 잘못된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의 말씀에 충실하게 해석해 나가다 보면, 성령께서 필요한 부분은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가 몰라도 문제될 것이 없는 부분은 넘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4.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제일 통쾌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다면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2-3) 다는 이 말씀입니다.
여기서 용을 옛 뱀이라고 표현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죄 가운데 빠지게 만들었던 사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던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귀는 인류의 역사 이래로 모든 사람들을 미혹하고 수많은 악한 사건을 일으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하여금 마귀의 자식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그가 행한 구체적인 일을 가리켜 성경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8:44)고 했습니다.
마귀는 욕심쟁이요 살인마요 진리 대신에 거짓으로 무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때때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며, 양의 탈을 쓰기도 하며 때로는 양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흉악한 이리로 나타나면서, 거짓선지자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만들고 더러운 우상숭배로 몰아가기고 합니다.
용으로 표현된 이 마귀는 짐승들에게 권세를 주었고, 그 짐승들은 또한 음녀 바벨론을 뒤에서 조종하며 지상교회를 핍박하였는데, 18장에서 이 음녀 바벨론이 멸망하고, 19장에서 짐승이 멸망하고, 남은 것은 용이라 불리는 마귀 사탄이었는데, 20장에서 더디어 천사의 큰 쇠사슬에 묶여서 무저갱에 던져짐으로, 하나님은 이 지구상에서 온갖 죄의 세력의 근본을 제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5. 특히 2절에서 “옛 뱀”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일본어 성경에는 나이를 먹은 뱀(old serpent) 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담 이래로 얼마나 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며 거짓말로 멸망으로 이끌고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교회를 훼방하며 성도들을 핍박했는지 그 이름에서 사단의 죄상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가정과 주위에는 이 옛 뱀에게 속아서 우상숭배하며 죄악을 범하며 하나님을 비방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이 옛 뱀이라 불리는 사단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거짓의 아비가 된 마귀를 단 한 명의 천사가 내려와 마귀 스스로의 힘으로 풀 수 없는 쇠사슬로 묶어서 무저갱에 던져 넣는데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던져 졌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릅니다.
이로 보건데 사단의 존재가 세상 불신자들에게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존재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귀에게 미움을 받아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21:18)고 약속하셨고, 친히 시험하는 마귀를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우리에게 영적 전투의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종이호랑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 초창기에는 주일 예배로 모이면 귀신들린 자들이 많을 때에는 7명이 와서 앉아 있기도 했는데,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다 물러가고 치료되었습니다.
오늘은 귀신의 뿌리를 뽑겠다고 작심하고 가면 귀신 같이 알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때에는 집에 찾아가서 예배만 드려도 귀신이 물러가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경험해보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하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악한 세력이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귀가 아무리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확신입니다.
6. 계속해서 본문의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5절에 기록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4절을 자세히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거나 자신의 믿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거나 자신의 목숨을 잃은 순교당한 자들을 말하는데, 당연히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그 어떤 마귀권세의 표를 받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그저 평범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거나,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세상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과 손해를 보면서 나중에는 목 베임 당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가기까지, 그 신앙의 여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한마디로 영적인 전투병들입니다.
7. 옛날에 한국 병사들이 월남에 갔다고 돌아오는데, 어떤 사람들은 베트콩과 맞부딪히면서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때로는 전사하고, 때로는 부상병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후방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있다가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투병으로 나갔으면 반드시 전투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베트남에 가보니 호치민 시에서 가까운 곳에 구찌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월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사수하던 미군과 적화통일을 이루려던 베트콩이 치열하게 전투했던 지역입니다.
그곳에 땅굴에도 들어가 보고, 베트콩이 설치한 여러 가지 함정이며 무기들을 보니 소름이 끼쳤고, 동맹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서 각국의 젊은 청년들이 부모 형제를 떠나 이역만리에 이곳에서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희생되었을까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들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영적싸움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4절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과연 십자가의 복음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싸웠으며 얼마나 그 분을 위해 희생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이 싸움을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롬8:18) 고 말할 정도로 그는 그렇게 복음을 위해 싸웠고, 주님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상 세계는 아직도 마귀가 발악하며 유혹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영적인 전투의 흔적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시면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온갖 육체의 원하는대로 살면서 이 세상에서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을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내세가 있으며 죄인에게는 불타는 지옥이 예비되어 있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고 기다리는 더 좋은 아버지의 나라가 있는 줄 믿습니다.
8. 마지막으로 본문 6절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의 복이 무엇입니까?
둘째 부활은 불신자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 영벌에 들어가는 과정을 말하는데 반하여, 첫째 부활은 이 둘째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세상을 살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사수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생명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의 절개를 위해서 짐승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처럼 우상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아니함으로 영원한 고통과 사망과 저주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도리어 저들은 마귀가 무저갱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이니 이 세상의 왕조들이 누리는 권세와는 전연 다른 차원의 권세요 영광인 줄 믿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내용 자체가 환란과 핍박 속에 있는 교회를 향한 위로와 소망의 말씀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면서 말씀을 지키면 영원한 승리와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마귀의 유혹이 강해도 인내로서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을 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면서 소망하며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당하는 아픔,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 십자가 때문에 겪는 희생과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리고 그 아픔이 우리 마음속에서 찬양과 감사로 바뀔 수 있다면, 6절 마지막에 기록된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는 천년 왕국의 통치자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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