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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에서 화해로(마태복음 5:21-25)
고영수 2020-06-10 추천 1 댓글 0 조회 792
[성경본문] 마태복음5:21-25 개역개정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분쟁에서 화해로(마태복음 5:21-25/2019.7.28.오전)


1. 우리가 이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살면서, 그리고 믿음의 형제들과 더불어 살면서 만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분쟁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분쟁이나 분노, 또는 살인에 이르기까지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염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본문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살인은 아니라도, 싸우고 분노하고 송사 하는 일이 일상 중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나 혼자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참을수록 늘 손해 보고, 참는 자를 약자로 생각하여 더욱 집요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러니 참고 싶어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서 부터 잠자리에 쓰러져 누울 때까지 집 안에서 가족들과의 마찰에서 시작해서 직장, 사회 속에서 분노와 분쟁 속에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난 5월 28일 아침, 가와사키시에서 일어난 통학 버스를 기다리던 초등학생을 칼로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19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나 지난 18일에 일어난, 경도 애니메이션 제1 스튜디오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으로 34명이 사망한 사건도, 결국은 세상을 향한 분노가 일시에 폭발되면서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한 번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하면 그 모든 에너지를 소모해야 분이 풀리는 것이 생리학적인 현상입니다. 대소변을 도중에 참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처럼 사람의 감정을 표출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생리적인 현상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회가 이런 일이 점점 증폭되며 사건의 규모도 대형 화 되고 있다는 사실이고,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처방이나 방법이 우리에게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의 말씀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마5:13-14)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고통 많은 세상을 위로하고 화해하며 치유할 수 있을지, 이런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기도하면서 답을 찾아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2. 그런데 세상 한가운데서의 분쟁은 우리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의 분쟁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도 분노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셨겠습니까?(마12:34, 23:33)
요2:13절 이하에 보면, 성전에서 물건을 놓고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들었다고 매우 분노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늘 분쟁과 분노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무역 분쟁으로 전 세계의 경제를 흔들어 놓고 있는 상황에, 최근에는 일본과 한국이 또 다른 무역 분쟁으로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향한 전략 물자 수출에 제동을 걸었고, 한국은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일으키면서 서로를 벼랑으로 몰고 가려고 지금 국제사회에 고소까지 일으킨 상황입니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도 싸움을 걸어오면 피할 수는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싸움이든지 일단 붙은 싸움은 반드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 이겨야만 생존이 가능한 것이 21세기의 현실입니다.
지금의 국제 정세를 보면, 내가 싸움을 원하지 않아도 내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싸우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왜냐면 한 번의 싸움에 국가나 인생이나 기업 간의 생사를 거는 싸움도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벌어지는 법정의 싸움은 처음에는 민사로 시작하지만, 승패와 관계없이 형사 문제로 발전하기 때문에 법정 싸움은 피를 말리는 싸움이고 지면 그날부터 내 인생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싸움이 시작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자존심에 발동이 걸려 절대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직장 동료들의 갈등에서 시작해서 사업 관계의 경쟁이나, 어린 학생들의 경쟁심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왜 주님은 끝까지 싸우라고 격려하는 대신에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본문에 보면 우리가 분쟁하고 미워하고 원망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본문 22절의 「라가」라는 이 말은 머리가 텅 빈 멍청이, 혹은 사악한 놈이라는 의미가 있는 히브리인들의 욕입니다.
그런데 이런 욕은 상대방의 존엄성과 인격을 모독하는 것으로, 그 대가는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람들의 욕은 그 종류가 너무 많고 다양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상대방을 헐뜯고 모욕을 주는 별의별 말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중에 나이 먹은 사람들을 향해 젊은 사람들이 틀딱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알아 먹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틀니를 끼고 딱딱 거리며 잔소리하는 노인네라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이런 단에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젊은이들이 노인들에 대한 숨어 있는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틀딱되신 분들은 노인들을 향한 젊은이들의 분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세대 간의 갈등에서 부터 시작하여 모든 분노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분쟁 대신에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생각해 보면 화내지 말고 화해하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정작 내가 당사자가 되어보면 결코 쉬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입니다.
대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수많은 잘못된 감정들이 어디로 확산하는지 잘 아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한번 시작하면, 다툼이 분노로 발전하고 그 분노라는 에너지의 방출 끝은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이란 그 밑바닥에 자존심을 깔고 있으므로 먼저 화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분쟁의 내용이나 대상이 어떤 것인지 관계없이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싸움에 휘말려도, 마음을 비우고 상대방과 화해를 시도하면 생각지도 못했던 길이 열리는 것을 잘 아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그 예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 예수님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과의 화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무리 중요해도, 24절에 보니. 그 이전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툰 이웃과 더불어 먼저 화목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도 중요하고, 예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웃과의 분쟁이 아니라 화해요, 분노하는 마음이 아니라 평안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에게 예배보다, 예물보다 먼저 화해를 명하셨습니까?
예수님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시" (골1:20)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금 내게 불편한 감정을 주고, 분노하게 만든 사람도, 심지어 재판 중인 상대방도 결국은 주님이 대신하여 피 흘려 죽어주신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이나, 분노하는 마음이나,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마음도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와의 막힌 담을 허시고 영원한 생명과 화목을 이루어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5. 그렇다면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며,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드러내시고 상을 둘러 엎으신 그 예수님의 분노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람들의 분노는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분노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분노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분노입니다.
그분의 분노는 어떤 특정인이나 집단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서 나오는 공의로운 분노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이기 때문입니다.
눈 만 뜨면 뉴스나 사방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고통의 소리요 분쟁 하는 소리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화목을 위해서, 분쟁을 버리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화해를 힘쓰는 자들에게 특별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문에서 나타난 대로, 모든 심판을 이기고, 모든 공권력을 이기고, 우리의 미래 문제까지 해결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분쟁은 서로 간에 많은 상처와 손해를 보게 만듭니다.
혹시 내가 재판에 이긴다 해도, 그 재판 과정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쏟은 분노와 잘못된 감정에서 쏟아진 수많은 언어는 결국 나를 망가뜨리고 하나님 앞에 큰 죄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쟁은 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쟁은 내 가족은 물론이고 더 많은 사람까지 망가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화목을 시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분쟁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화목 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모든 싸움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6. 창세기의 얍복강의 야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님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간 야곱이 이제 성공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형님 에서는 원수 갚는다고 칼을 갈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밤새도록 강가에서 기도함으로 오랜 세월 원수 되었던 이 문제를 풀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형님 에서와의 잘못된 관계처럼 보였지만, 이것은 하나님과 야곱의 잘못된 관계에서 오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로 맺힌 고통의 인간관계를 풀려고 기도하던 야곱에게 제일 먼저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이름을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지금까지 물질만 추구하고 축복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일어서며 새 이름을 얻은 야곱 아닌 이스라엘 앞에 펼쳐진 새로운 세계는 어떤 세상이었습니까?
분노의 칼을 갈고 기다리고 형 에서가 먼저 감동하고 먼저 화해를 표시하며 다가왔습니다.
바로 이것이 화해를 위해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는 자가 받는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우리 안에 가득 찬 분노와 분쟁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구하며 화해하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더 크고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화해의 능력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또한 세상의 모든 분쟁과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큰 화목자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고후5:18절에,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 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 프란시스코는,「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7.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감정들은 분노와 미움과 분쟁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분쟁과 분노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화목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나 자신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욥기22:21에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화목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야곱 처럼 먼저 그분 앞에 무릎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화해 대신에 분쟁하고, 감사 대신에 분노하며 살았던 자신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배가 끝나고 가정으로 돌아가면 오늘부터 식구들과 내가 먼저 화해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이에, 자식과 부모의 사이에, 형제 사이에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나가서 친구들과 이웃들과 동료들과 화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화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하고 큰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반복하고 분쟁하는 사이를 화목케 하는 일보다 더 귀하고 복된 일은 없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자신의 몸을 드려서 화해를 이루셨고, 하늘과 땅을 화해하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잘못된 모든 관계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능력이요 위대한 사명인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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